특권사법의 은신처, 87헌법

[특별기획 : 개헌,반신자유주의 정치논쟁으로](4) - 사법개혁과 개헌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지 않는다

헌법 제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나는 이 조문을 읽을 때마나 이 조문이 도대체 어느 달나라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 법관을 보면 법조문과 상관없이 권력과 인맥과 돈에 따라 비독립적으로 심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과 판단은 그저 무시해도 좋을 억측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를 조금만 살펴보면 정치권력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전관예우나 관선변호도 따지고 보면 권력적 외압에 취약한 법관의 자화상이다.

판사들이 안면에 휘둘리는 것도 우리 사법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판사들은 고등학교나 대학동문, 연수원의 동기, 지연, 법원 내에서 동료관계 등으로 형성된 개인적 친소관계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원고나 피고가 담당법관을 알아낸 후 그와 친한 변호사를 찾아 나서는 것도 그런 탓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수치스럽게도, 특정 법관과 친한 변호사를 찾아주는 유료 법률서비스가 존재한다!

판사가 권력과 인맥에 휘둘린다는 것은 결국 판결이 돈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돈이야 말로 권력과 인맥을 동원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한 현직 법관이 논문을 통해서 밝혔듯이, 유전무죄·무전유죄는 엄연한 현실이 된다. 얼마 전 구속된 법조 브로커 김홍수는 골프나 향응제공을 거부한 판·검사는 없었으며, 사건을 청탁했을 때 90%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의 사법현실이다.

법관이 이 지경이니 국민이 재판을 불신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들 알다시피 전직 교수가 판사를 조롱하고 능멸하고 또 석궁으로 판사를 쏘았을 때, 국민은 오히려 교수를 옹호하고 심지어 환호하기까지 했다. 이 엄청난 불신의 깊이를 사법부는 아는가 모르는가?

사법권력이 문제다

무릇 사법이란 한 사회의 최종적인 공식적 가치판단이다. 그런데 재판과정을 자세히 보면, 판사는 단순히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판사는 해석을 통해서 법을 만들어 나간다. 예컨대, 노동자의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이 가능하다고 해석하면 그것이 법이 되고, 그렇지 않다고 해석하게 되면 그것이 법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판사의 자유이고, 판사의 결정은 그대로 강제집행된다. 역으로 판사가 채택하지 않는 해석은 강제집행되지 않으며 그 점에서 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보듯이 판사는 사실상 하나의 입법권자이다.

여기에 판사의 사실판단 권력이 추가되면 판사의 권력은 실로 막강해진다. 예컨대, 판사는 재판에서 특정 증거가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을 사실판단이라고 한다. 대부분 사건에서 재판의 성패는 이러한 사실판단이 결정한다. 판사는 이를 통해서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재판결과를 낼 수 있다. 예컨대 김명호 사건을 보면 재판부는 김명호에게 유리한 증거는 인용하지 않고, 불리한 증거는 채택했다. 즉 사실판단이 재판의 결과를 좌우하고 사실판단은 전적으로 판사의 자유이다.

이것이 사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법작용이 하나의 권력현상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판사는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이 아니고, 권력을 행사하는 막강 권력자이다. 그는 법을 만들고 특정인의 인생을 재단한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이 정치권력과 인맥과 돈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이 나라의 법이 그리고 이 나라 자체가 권력자와 유산자를 위해서 운영된다는 것이다. 사법이 바로 서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서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사법을 바로 세워야 한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사법부는 여전히 독재정권의 더러운 냄새를 뿜어댄다. 심지어 최근 사법부는 더욱 노골적으로 유산자와 자본에 굴종하는 판결을 쏟아낸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사법의 구석구석까지 배어들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지난 20년간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만으로는 사법부가 정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했다.

또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이미 특권계급화된 사법의 부패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막강한 사법권력이 정치권력의 정략적 도구로 이용되지 않고, 또 유산자와 자본의 앞잡이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이 직접 사법권력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부패한 특권사법의 은신처로서의 1987년 헌법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사법권도 당연히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실제 사법현실에서는 국민을 능멸하는 특권적 사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배후에 낡은 헌법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국민주권을 선언한 헌법 제1조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101조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무슨 모순이며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사법권이 법관으로 구성된 사법부에 속하다니! 이는 현행 헌법이 애당초 국민의 사법에 대한 관념을 부인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헌법은 국민이 사법권의 주체가 아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현행 헌법에 의하면 국민은 재판의 대상일 뿐이고, 법관만이 재판의 주체이다. 이러한 증거는 헌법 제101조 이외에도 많다. “법관은 …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선언한 헌법 제103조도 국민의 사법참여와 사법통제를 막는 조항으로 인용된다. “모든 국민은 …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헌법 제27조도 마찬가지이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고, 나머지 법관은 대법원장이 임명하게 한 헌법 제104조도 사법권력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통제를 저지하는 조항이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과 시대정신은 사법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통제를 요구하지만, 정작 헌법은 그것을 겹겹이 봉쇄하고 있다. 심지어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시민에 의한 재판, 예컨대 배심제나 참심제도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사정이 이 지경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헌법이 존재하는가? 헌법은 국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한 존재이유가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폐기되거나 개정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법과 관련한 헌법의 규정이 이러하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사법권이 국민에게 속한다는 선언이 있어야 하고, 그 구체화로서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권리를 상세히 규정해야 한다. 예컨대, 국민은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선출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각 법원장을 선출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배심재판을 할 권리와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국민은 판사의 임용과 징계 등 법관인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사법행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법관을 소환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모든 판결문을 볼 권리가 있다. 국민은 저렴한 비용으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 등등.

비대한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의 적

헌법재판소도 판결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사법기구이다. 그러나 의회가 작동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재판소가 반드시 필요한 기구인지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사실 헌법재판소는 의회의 급진화를 막으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음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헌법재판소는 태생적으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막는 보수적인 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비대화는 언제나 민주주의의 적으로 등장한다. 우리 나라 헌법재판소가 딱 그 꼴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기능은 대폭 축소되어야 하고, 판결의 영향력도 축소되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긍정적 존재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의회에서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소수자의 인권보호 기능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헌법 제11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관장사항(법률의 위헌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항쟁의심판, 헌법소원) 중 기본권보호와 직접 연관된 헌법소원 이외에는 모두 삭제함이 마땅하다.

아울러 헌법재판소도 사법적 권력기구인 만큼, 헌법재판소에 대한 민주적 통제장치를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다. 지금처럼 법관만 헌법재판관이 되도록 한 것(헌법 제111조)은 넌센스이다. 그리고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자가 헌법재판관이 되도록 한 것도 잘못이다. 특권의식에 절은 법관이 과연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 있는지 의문이며, 권력자가 지명하는 헌법재판관이 국민의 법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은 권력자의 통치수단이 아니고 국민의 권리장전이어야 한다.

헌법을 좀 더 살펴보면, 사법과 관련한 조항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헌법의 구석구석에는 권위주의의 흔적이 너무나 역력해서 전면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정부나 국회의원은 법안을 발의할 수 있지만 국민은 법안을 발의할 수 없다. FTA와 같은 중요한 사안이 있어도 국민은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없다. 잘못된 공무원이 있어도 국민은 소환할 수 없다. 대통령, 정부, 국회 등 통치기구와 관련한 수많은 규정은 권력자들 간의 권력배분에 대해 다루고 있을 뿐, 국민이 이들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러한 것들이 1987년 헌법의 인식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완전히 권력자 위주의 서술체계와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개헌을 통해 이것을 역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 위주의 서술체계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헌법이 국민에 대한 권력측의 통제수단을 나열한 문서이기를 그치고, 국가의 존립목표와 국정운영의 원칙을 선포하는 문서로 거듭나야 한다. 여기서 국가의 존립목표는 국민의 인권증진이며, 국정운영의 원칙은 당연히 국민주권이다. 이렇게 볼 때 헌법은 국민이 인간과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해 갖는 권리의 선포문, 다시 말해 국민의 권리장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헌법의 본령이다.
덧붙이는 말

이상수 님은 한남대 법대 교수로, 새사회연대 정책위원 및 민주사법국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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